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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후야 우카이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 목적지는 에도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아사쿠사'입니다. 시바 공원을 지나 다이몬 역으로 가서, 아사쿠사 라인을 타면 됩니다. 가는 길에 조죠지(增上寺) 를 볼 수 있다는 것도 덤이죠. 


조죠지의 자랑인 도쿠가와 역대 장군들의 유품을 모아둔 보물전시실의 안내판입니다.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인 이파리가 셋인 '아오이몬'이 선명하게 찍혀 있습니다. 


조죠지는 정토종(浄土宗) 8대 교조에 의해 1393년에 건립된 절입니다. 당시에는 지금의 도쿄가 아직 개발되기 전이니 절의 규모가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1590년, 도쿠가와 가문의 보리사(菩提寺)로 선정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보리사는 조상을 모시는 절이라는 의미로, 이제 우리 가문의 사람이 죽으면 이 절에서 보살펴주도록 정했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도쿠가와 가문의 많은 시주를 받았을 것이고 부하들이나 주민들도 알아서 받들어 모셨을 것이니 교세는 날로 커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1590년은 도쿠가와 가문이 에도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한 해인데요, 당시 도꾸가와 가문은 천하의 주인 도요또미 히데요시에게 많은 견제를 당하고 있었고, 관동 지방을 다스리던 호조 가문이 무너진 이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상을 주겠다면서 이미 다스리던 다섯 주를 빼았고, 간또(関東)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킵니다. 당시 천하를 장악한 히데요시는 아케찌 미쓰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것처럼 (일설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아케치의 이전 영지를 몰수하고, 아직 적의 땅이던 이즈모, 이와미의 넓은 땅을 주겠다고 해서 아케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있습니다.)


"못참겠지? 너도 반란을 일으켜라. 죽여줄테니."


라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신들 중에는 실제로 땅을 빼앗기는 데 울분을 느끼고 차라리 싸워보자는 주장을 하는 자도 많았지만 이에야스는 이들을 다독거리며, 1590년 8월 1일 당시에는 시골마을이던 에도로 입성합니다. 도꾸가와 가문은 살던 영지를 떠나 새로운 땅에서 민심을 모아야 했으므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예전 호죠 가문의 가신들을 받아들여 지방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이제 나도 이땅에 묻힐 것이다." 라는 의미로 이 부근에서 좀 잘나가는(?)절이었던 조죠지를 보리사로 지정합니다. 이후,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1603년 에도막부를 설립하면서, 이 절은 단순히 지방 다이묘의 보리사에서 막부 대장군이 묻히는 보리사로 덩달아 출세(?)하게 된거죠. 막부 정권이 한창이던 때, 조죠지에는 3,000명의 스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조죠지에는 2대 히데타다를 비롯한 여섯명의 쇼군과 그의 가족들(측실, 친지 포함)등의 묘소가 있다고 합니다. 덩달아 부장품도 절의 소유가 된거죠. 뭐. 


원래 죠조지를 볼 생각은 없었고 그냥 지나치려했는데, 요 이쁜 광경을 보니 안에 들어가보고 싶지 뭡니까? 추울까봐 아기석상들에게 빨간색으로 뜨개질한 모자들을 씌워주었네요. 이쁘기는 하지만 이 석상은 사산한 태아를 위로하기 위해 세우는 석상이라고 하네요.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들이 석상에 모자를 뜨개질해서 씌우고 바람개비를 꽃아둔다고 합니다. 


식물원도 아닌데 겨울에 소철(Sago palm)이 정원에서 자라고 있네요. 과연 도쿄데스네....


명성이 자자한 조죠지 3층 본당입니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74년 재건하였다고 합니다. 전체는 48*48미터의 4각형이고, 높이는 23미터입니다. 48개의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는데 정토종에서는 48개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데 이 숫자에 맞추어 기둥을 세우고 가로, 세로 길이를 정했다고 합니다. 이 본당 지하에 아까 위에서 이야기한 보물전시실이 있습니다. 뭐 별 흥미가 없어서 들어가보지는 않았네요. 


본당 사진 한장 더. 뒤에 도쿄타워가 배경으로 높이 서있습니다. 아래 절의 입구격인 중문에서 대전까지 이르는 계단이 모두 43개인데, 18단 계단과 (극락왕생을 비는 소원의 개수), 25개 계단(아미타 25 보살을 의미)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합니다.


삼문에서 아까 그 대전까지의 거리는 48간(間)입니다. 참고로 이 문은 절의 '중문'역할이고, 나중에 볼 '대문'에서 본당까지의 거리는 108간(間)이라고 하네요. 108은 108번뇌를 의미하고 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면 해탈한다고 하지요.


좀 애매하네요. 구글맵에서 거리를 재보면, 대전에서 대문까지 길이는 361미터입니다. 이게 108간이면 1간 = 3.34미터죠. 그리고 삼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는 144미터인데, 이게 48간이면 정확히 1간 = 3미터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1간은 대략 6자 (1.8미터)정도라고 알려져 있거든요. 어느쪽이 진짜인지는 모르겠네요. 어차피 정확히 과학적으로 재던 단위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삼해탈문(三解脱門). 흔히 줄여서 '삼문'이라고 불립니다. 현재 수리중인데 다른 건물과는 달리 나무로 되어 있더군요. 1622년 도쿠가와 가문의 시주에 의해 지어졌고, 당시 모습이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로 국가 중요 문화재(=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삼해탈문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세가지 번뇌에서 해탈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문'이 3개로 이루어져 있지요. 중앙에 큰문, 양쪽에 작은 문을 두는 게 일반적인 구조인데 여기서는 각각의 문의 크기가 거의 같아보이네요. 


다이몬(大門)입니다. 원래 이 문이 조죠지의 입구입니다. 구글지도로 측정해보니, 여기서 아까 그 커다란 삼문까지 217미터인데 대략 한 블럭 이상이 원래 절의 영지였던 셈입니다. 


메이지 유신 후 잘나가던 도쿠가와 가문이 망하자, 잘먹고 잘살던 조죠지에도 불행의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절의 영지도 다 빼앗기고 중문 밖의 영지도 다 징벌 당했기에 곤궁해진 조죠지는 절의 영지 밖에 쓸쓸히 남은 대문을 도쿄시에 기부합니다. 이후 노화된 대문을 도쿄시에서 근대 건축의 힘으로 1937년 철근 콘크리트를 써서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 대문은 2차대전 도쿄 대공습 때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고도 성장시절에는 이 문 때문에 버스가 지나갈 수 없다고 항의도 많이 받았는데 뜻있는 지역 주민들이 '우리 지역의 상징이여'라고 서명운동을 해서 다행히 해체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도쿄도는 다시 조죠지에 이 문을 반환하였고 (절의 돈으로 관리, 수리하거라!) 조죠지는 2017년 이 문을 다시 개보수합니다.  이러고보니 참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친 문이네요. 이 문도 큰문 하나, 작은문 둘의 3문 구조네요. 아까 삼문처럼 나무로 된 것도 아니고 완전 신품에 가깝기 때문에 이것은 국보도 보물도 아닌 지방 문화재, 즉 '미나토 구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구 문화재'로 등록한 이유는 문은 조죠지의 것이지만, 도로는 도쿄시의 것이라서 구 문화재로 등록해야 도로 점용료를 안낸다고 합니다. 결국 부처님 세상에서도 돈은 중요한거죠. 


이렇게 다이몬까지 보고, 아사쿠사로 출발합니다. 그냥 지나가면서 산만하게 본 거지만, 조죠지도 나름 볼만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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