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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간의 겨울 방학동안,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오스틴에 남아있는 한국 학생들끼리는 왜롭지 않은 따뜻한 연말을 보내기 위한 초대와 방문이 빈번하게 이어지고 있다.

성진이네 집에 초대를 받은게 어젯 밤, 어쩌다보니 오늘은 우리집에서 파티가 잡혔다. 다른 집에서는 '제수씨' 혹은 '형수님'이 준비를 한다면, Solo인 나는 내 스스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이 좀 다르다. 내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또다른 나라고 할 수 있는 (있다고 칩시다-_-)나의 Ego와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그 대화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지? (오전 11시 30분쯤)
Ego: 그래야 겠지. 그러고보니 음식을 해서 사람을 초대하는 게?
나:    거의 처음이군요-_-;;
Ego: 즉,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뭘 준비해야 할지 전혀 모른다는 소리군!

그래서 야단이 났다!!!

남자 녀석들만 오면, 라면만 끌여주면 된다지만, 제수씨가 둘이나 온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더구나 제수씨들 온다고 테마를 '브루고뉴 와인 파티-_-'로 정해버리기까지 했으니...
남자들한테라면 몰라도, 제수씨들께 체면이 있지, '라면에 와인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부랴부랴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았다. 메뉴를 정할 능력이 없으니, 크리스마스 파티때 룸메이트의 여친이 준비했던 메뉴를 그대로 흉내냈다. (정확히 흉내내지는 못했고, 집의 남은 재료를 모조리 재활용 했다.)

그리하여 준비된 메뉴는... 양과 종류에 있어서 찬사를 받을 만한 것이었으나 (질은 좀-_-), 정신이 없어서 사진은 하나도 남기지 못한 고로, 글로 대신한다.

전채: 샐러드 ( 정확히 말하면 따뜻한 고구마, 삶은 계란, 어린 야채, 삶은 브로컬리와 아기 양배추 + 아보카도, 바나나 소스 + 발사믹)

전채2: 구운 아스파라거스 + 베이컨 말이

전채3: 고구마 + 모짜렐라 오븐 구이

앙뜨레: 채식 주의 분들이 계셔서 준비한 토마토 소스의 링귀니면 스파게티
           마스카포네 치즈와 고르곤졸라 치즈 베이스 크림 소스의 링귀니면 해물 스파게티

후식: 과일 (제수씨들이 가져 오셨음)

장을 본 시간을 포함, 꼬박 6시간을 준비했지만, 미흡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도 다들 준비한 성의를 봐서 열심히 드셔주셔서... 기분은 좋았는데, 스파게티 내가 먹기에도 좀 미안하더라-_-;; 휴... 3인분 이상은 준비해 본 적이 없어서 면은 어느새 퍼져 버리고 (알덴테는 고사하고-_-) 소스는 기름 범벅...

그래도 와인과 음식이 나름대로 잘 맞아서 다행이었다.

오늘 준비한 와인은 모두 3병, 원래는 빙쌍 지라르뎅의 2005년 브루고뉴와 화이트 와인으로 샤샤뉴 몽라쉐 중에서 한 병 고를 예정이었는데, 단골(로 구경가는) 와인 샵이 문을 닫아 버리는 바람에 부랴부랴 대체품을 찾느라 고생이 막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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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고른 게, 만만한 루이 자도 (Louis Jadot)의 Chardonnay와 Bourgogne, 한국에 있을 때부터 가격 대 성능비가 좋은 브루고뉴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브루고뉴에 최고의 해 였다는 2005년이라 매우 기대가 컸다.

하지만, 내가 요리하느라 온갖 조미료 (소금 및 각종 향신료) 와 기름냄새 (베이컨, 올리브 오일 등) 크림 소스로 코가 마비가 되어 있어서 아무런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억울할데가...

오늘을 위해 준비한 조금 비싼 와인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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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신의 물방울 12권을 보신 분이면, '아~' 하고 본적이 있다고 생각하실 마크이리라! 몽자르 뮈레네, 아쉽게도 리쉬부르는 아니고, 물론 2005년도 아니고 2004년, Von Romanee 마을 단위 와인이다. Grand Gru도 뭐도 아니지만, 가격은 비싸기 그지 없어서 세금 포함 $60 정도, 한국같았으면 Vosne Romanee라는 이름값 덕분에라도 12만원 이하로는 구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수입도 안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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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인 역시 음식 준비로 코가 마비 되어서, 별다른 향을 느낄 수 없었다. (억울해!!) 하지만 손님들은 '정말 맛있다'며 극찬을 해주었다.

한국 사람들의 정이란 이런 게 아닐까? 크리스마스도 초대 덕분에 외롭지 않게 보내고, 오늘도 조금 전에 형님 한 분이 설날에 떡국 먹자고 초대하셨다. 아무런 한 것 없이 한살 더 먹어 한숨이 나오지만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한편으로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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