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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덮인 창덕궁 후원과 애띤 연두빛 풀로 덮인 창덕궁 후원, 물줄기가 시원한 창덕궁 후원을 한꺼번에 본다면 정말 아름다운 봄풍경을 눈에 담아올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올 봄에 그런 풍경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올 초봄의 이상 고온으로 꽃들은 순식간에 피어버리더니, 한순간에 힘이다하듯 져버렸고 비는 그다지 많이 오지 않았지요. 이상적인 기온이 찾아와 연두빛의 잎과 꽃이 함께 자리하고, 비가 제법 와서 옥류천에 넉넉한 수량의 물이 흐르는 시간은 아마 앞으로는 구경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온난화 되어가는 이 세상에서는요. 

그렇다 하더라도 봄, 새순이 돋아나고 잎이 아직 진한 여름색을 띠기 전의 왕족들과 측근들만 거닐었다는 금원의 경치는 필히 감상하실만 합니다. 저에게 창덕궁 후원을 언제 보겠느냐고 기회를 준다면 가을 단풍이 한창일 때가 첫째이고, 지금 연두빛이 낭창한 봄철이 그 다음입니다. 


한때는 비원이라고 불렸었지요. 지금도 영문명으로는 Secret Garden이라고 되어 있지만 정식 명칭은 창덕궁 후원입니다. 입장 제한으로 한번에 100명씩, 하루에 900명(외국인 제외)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휴일에는 늦게가면 표가 매진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람료 또한 궁궐 관람료중 가장 비싼 5,000원인데 반드시 안내원이 동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가끔 특별관람이라고 해서, 자유관람을 허가해준 적도 있습니다.) 제가 간 날도 이미 마감이었는데, 마침 취소하는 사람이 있어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의 담장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하지만 이런 단체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한가로이 걸어보고 싶다구요.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맨 앞에서 걸어야 했습니다. 나무 색감이 끝내주는 계절이었으나 iPhone4s의 색감은 많이 아쉽네요.

후원의 넓이는 대략 15만평입니다. 자연지형에 맞추어 산자락 모양을 해치지 않고 만들어졌죠. 그래서 궁궐 답지 않게 높낮이가 일정지 않고 산자락을 따라 오르내려야 합니다.  

후원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소인 부용지가 바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왼쪽에 작게 보이는 연못이 부용지, 정면의 건물이 영화당입니다. 

영화당은 신발을 벗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영화당에서 부용지를 바라보면 인공섬에 심어진 소나무가 참으로 멋스럽게 보입니다. 다만 창덕궁 후원의 수량이 점점 적어져서 물을 흐르게 할 수 없기에 물이 더러운 것은 아쉽습니다. 예전에는 여기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하더군요. 섬 왼쪽에 있는 정자가 부용정이고, 섬 뒤로 보이는 작은 전각이 '사정기비각'입니다. 이 부근 어디에 우물을 만들었는데 그걸 기념하고 비를 세우고, 그 비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건립했다고 하는군요. 조선시대 건축은 하나같이 풍수와 도교사상의 영향을 받았는데, 부용지 모습도 그렇습니다.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사상을 보여줍니다. 왕들이 배를 타고 즐기는 연못이 네모진 땅을 의미하고, 올라기지 못하게 나무와 화초를 가득심은 섬이 둥근 하늘, 신선이 노니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주합루와 어수문입니다. 주합루의 1층은 바로 정조가 세운 내규장각입니다. 정조를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약점이 있었기에 신하들에게 책 잡히지 않으려고, 정조는 철저히 성리학자여야했고, 때문에 결국 실학을 외면하고 다 죽어버린 주자학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지요.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였으나 성리학자의 한계로 조선이 당면한 문제점을 고치거나, 부강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조금만이라도 문화적 충격을 경험할 수 있었더라면 정말 좋았겠지만, 결국 조선과 중국 이외의 세상을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지 못한 아쉽고 아쉬운 왕입니다. 허참! 놀러왔는데 내규장각을 바라보니 별 생각을 다하게 되네요.


부용지 한 컷 더!

주합루로 올라가는 문입니다. 어수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주합루 앞의 '화계(꽃계단'입니다. 낙선재 뒤의 화계의 꽃이 이미 저버렸다면 이 곳은 산그늘에 위치해있어 서늘해서 인지 아직 꽃이 활짝 피어있습니다. 산그늘에 핀 꽃잎이 곱기도 하지요. 여기서 또 독특한 화계의 모습의 하나를 보시게 되는데 바로 취병입니다. 푸른 병풍이라는 의미인데, 대나무로 틀을 짜고 신우대라는 여러해살이 식물을 심어서 만든 담입니다. 예전 궁궐모습을 담은 그림인 동궐도에 주합루 앞에 취병이 꾸며져 있어 이를 재현한 것이지요. 


창덕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의 일부입니다. 왼쪽 아래 있는게 부용지, 예전에는 섬이 좀 호수 가운데 있었네요. 뱃놀이를 하는 그림이 있고, 주변에 심어진 꽃나무가 눈에 띕니다. 주합루 앞에 길게 담처럼 있는게 바로 취병입니다. 그걸 재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예전에는 이쪽에 나무가 좀 적었던 듯 하네요. 오른쪽에 보이는 게 영화당, 그리고 오른쪽 너른 평지가 춘당대입니다. 활쏘기를 하고 멀리 춘당지까지 볼 수 있게 되어 있네요. 지금은 나무와 담이 있어서 옛모습이 아닙니다. 


부용지 한가운데 있는 섬의 모습입니다. 이 섬도 동궐도에는 없는데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예전 춘당대, 현재도 평평하게 가꾸어져 있습니다만 옛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아마도 일제시절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하고 동물원을 만들면서 바꾼 때문일 듯 하네요.

부용정을 지나 다음 코스인 애련지를 방문합니다. 가을 단풍이 정말 고운 곳인데 봄의 정취는 그에 미치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의두합과 애련지는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가 즐겨 찾았다는 곳입니다. 효명세자 독살설 같은 떡밥이 절로 떠오르지만, 어차피 효명이 어떤 정치를 하던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는 없었겠지요. 애련지 옆에 있는 저 정자는 '애련정'입니다. 봄에 와서는 그 정취를 느끼기 쉽지 않고 가을빛이 곱게 물들 때 돌아보면 더 없이 좋습니다. 애련지의 '련'은 연꽃을 의미합니다. 송나라때 주돈이라는 연꽃덕후가 "연꽃은 더러운 물에서도 맑고 깨끗한 것이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칭송한 애련설(愛蓮設)이라는 글이 있는데 거기서 따온 것입니다. 그런데 연꽃이 어디갔는지? 하나도 없네요.


애련지 위에는 또 하나의 작은 호수가 있고, 궁궐 내 집이 아니라 일반 사대부의 집처럼 지어진 '연경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연경당 쪽에서 바라본 애련지! 효명세자가 책을 읽었다는 의두합, 기오헌 사진은 제대로 찍지 못했네요. 애련지와 연경당 사이에는 또 하나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이 곳에도 어수당이라는 것물이 또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자취가 없습니다. 


원래 코스는 이게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연경당을 먼저 구경하게 됩니다. 쏘다니다가 우리팀을 잊어버리고 외국인팀과 섞여버렸지요. 연경당은 궁궐이 아니라 민간 '사대부' 양식을 따라 지은 집으로 당시 나라일에 관심이 없이 놀기를 좋아했던 왕 '순조'가 한가로이 지냈던 곳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의미보다는, 조선 건축개념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 '건축개념'의 진수라는 것은 풍수와 상징을 통해서 건축물이 집주인이 바라는 어떤 것을 상징하도록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진에 있는 문은 연경당 정문인 '장락문'인데 도교에서 신선이 산다는 '장락궁'을 따온 것입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위 사진 중간쯤에 장락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작은 개울 하나를 건너야 합니다. 그 개울 이름이 '명당수'인데 서쪽에서 들어와 동쪽으로 흘러갑니다. 풍수사상에서, 본류(한강)는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흘러야하며 지류는 반대여야 하는 개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명당수가 위치상 신선이 뱃놀이하는 '은하수'를 상징합니다.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장락문 바깥에는 오래묵은 느티나무가 있고, 주변에 석물들이 몇몇 있습니다. 석물에는 두꺼비와 토끼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 상징이 장락문과 어울리면서 연경당을 '달에 있는 신선이 사는 궁궐'로 만들어 줍니다. 토끼는 오래전부터 달에서 절구를 찧고 있었구요 두꺼비가 달과 관계가 있다는 걸 아시는 분은 적으실텐데, 방금 검색해서 찾은 지식을 풀어보자면아는척을 해보자면 전한 시대의 학자 유향이 지은 오경통의는 중국의 허무맹랑한 신화, 풍설을 전하고 있는데 달에는 두꺼비가 있다고 하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태초의 회화는 태양 열을 낳았고, 동쪽 바다에 살면서 열개의 태양 형제를 하나씩 하늘로 올려보냈다. 차례를 기다리는 게 불만이었던 태양들은 어느날 동시에 하늘로 뜨고 말았는데, 열 개의 태양이 일제히 내리쬐는 햇살에 땅은 불덩이가 되었다. 이에 천제는 명궁 '예'를 불러 해를 쏘아 떨어뜨리도록 하였다. 지상을 구한 공으로 예는 '불로불사약'을 하사받았으나 그의 아내 항아가 이를 훔쳐먹고 월궁으로 날랐다. (마누라에게 잘해줘봐야 훔쳐서 튈거라는 사상은 이후 동양에 대대로 전수되어 한국에는 아들 셋 낳기 전까지 마누라에게 좋은 옷을 사주지 말라는 선녀와 나무꾼에 이르기 까지 구구이 반영되고 있다. 이는 공자를 비롯한 많은 당시 유학자들이 여성에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 안타까운 현상이 아닐까 한다. 하긴 여성에게 인기가 있는데 왜 유학 따위를 공부했겠는가?) 천제는 몹시 분노하여 항아를 두꺼비라이제이션시켰고, 그리하여 두꺼비는 달을 상징하게 되었다. 


뭐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장락문이라는 이름과 앞의 명당수, 토끼, 두꺼비같은 석물을 만들어서 '글줄 좀 읽으신 분이면 이 집의 개념이 이러이러 하오니 좀 알아차려 줍시오.'라고 광고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뭐... 그런거지요. 어찌보면 풍류요, 어찌보면 글줄 좀 읽었냐? 라고 물어보는 듯한 도전적인 집꾸밈입니다.


장락문을 통과하여 보이는는 연경당의 내부는 넉넉하고 멋스럽습니다.

특히나 이 내외담 부근의 나무들이 화초가 풍겨내는 분위기가 대단합니다. 봄단풍 색은 가을단풍에 미치지 못하지만, 담장위로 넉넉하게 솟아난 나무가 길게 가지를 두르고 있는 광경이 너른 마당과 어우러져 절로 집안 분위기를 여유롭고, 고상하게 만들어줍니다. 저 나무 배치와 수종을 어떻게 정했을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무질서하게 배치된 거 같은데도 이리 어울리니 말입니다. 참고로, 내외
담은 사랑채와 안채를 나누는 담인데, 남녀유별을 부르짖던 조선 후기에는 외간 남정네가 집안에 들어오면 이 담의 문은 무조건 닫혀 있어야 했죠. 그래서 내외담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데, 다른 문으로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어서 '헛담'이라는 말도 있다고 하네요.


안채의 풍경을 찍어 보았습니다.


어느 커플이 남녀상열지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찍어봅니다. 

주위는 울창한 나무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더 안정감이 드는 듯 하네요.

안채와 안뜰을 내외담의 또 하나의 문입니다. 문 입구가 매우 낮은 것도 특징입니다. 진달래가 곱게 피어 있는데 저 아저씨는 비켜주지를 않더군요.ㅠㅠ

내/외국인 들이 웃으면서 사진 찍고 있는 모습이 하도 밝아보여서 도둑 촬영을 해보았습니다. 

서울시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이런 호젓한 정원이 있다니.. 하나 가지고 싶습니다만--;;; 

한반도 모양을 하여 '반도지'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연못입니다. 이런 모습은 일제시대에 변형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네요. 왼쪽 약간 언덕위에 있는 정자가 승재정, 오른쪽 연못가에 있는 정자가 관람정입니다.

풍경 좋기로 후원의 여러 정자들 중 손꼽히는 관람정입니다. 특이하게 연못을 향해 퍼지는 부채꼴 모양을 한 정자입니다. 현판도 나뭇잎 모양으로 매우 특이하고 개성적이지요. 그 꽉막힌 조선후기에 어찌 이런 독창적인 정자가 나올 수 있었는지 연구가 필요할 듯 합니다.

수풀로 뒤덮인 승재정.

반월지와 존덕정의 모습입니다. 반달모양이라 반월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실제로는 사각형입니다.

옥류천입니다. 글의 첫머리에 수량이 풍부하지 않아 못내 아쉬운 듯 글을 썼었는데 옥류천이 이리 말라버린 안타까움에 그리 말한 것입니다. 
옥류천 바로 옆에는 소요정이 보입니다. 물이 흘러 시원한데 물 떠다마시며 시를 읊조리던 곳이지요.


소요암입니다. 자연환경을 멋지게 이용해서, 정원의 풍경으로 삼았습니다. 중국인들은 바위와 흙으로 정원에 산처럼 꾸미는 게 발달했다면, 산이 많은 한국에서는 그냥 산과 바위를 이용해서 신선이 사는 한 풍경을 꾸몄습니다.  

왼쪽 위에 바위 뒤 뚜껑이 있는 곳이, 인조 때 바위를 뚫어 팠다는 우물이고, 옥류천의 수원입니다. 우물에서 나온 물은 바위의 오른쪽을 감아서 다시 왼쪽으로 와서, 소요암 아래 너른 바위에는 굽이치는 강처럼 판 물길(유상곡수)을 따라 치달린다음, 바위 아래로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어 두었습니다. 운치가 대단하네요. 작은 바위 풍경 아래 폭포와 강의 모습을 담았고, 바위는 산 형상으로 버티고 있으니 이 작은 공간 안에 세상을 꾸며 둔 셈입니다.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소라는 건 이 유상곡수의 아름다움 때문일겁니다. 인조, 숙종 때는 북악산 자락의 물이 이보다 풍부해서 수량이 많았을 것 같은데 지금은 상당히 많이 말라버렸네요. 여기만 그런게 아니라 인왕, 북한산, 북악산 쪽 산에서 나오는 물의 수량이 다 예전만 못하다고 합니다. 장마철이나 되어야 물줄기가 제법 있다고 하죠. 


소요암에는 조선시대 최강 무능한 왕인 인조시대에 '옥류천'이 만들어졌고, 후에 숙종(나름 똑똑했는데 한일은 없는 무능한 왕이었죠)이 쓴 시구가 세겨져 있습니다.

飛流三百尺  (비류삼백척)  폭포는 삼백척인데

遙落九天來  (요락구천래)  멀리 구천에서 내리며

看是白虹起  (간시백홍기)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

飜成萬壑雷  (번성만학뢰)  골짜기 마다 우레 소리 가득 하네.


비류삼백척이라는 말은 이태백이 지은 시, 망여산폭포의 '비류직하삼천척'에서 따온 구절입니다. 소요암을 하나의 바위가 아닌 '산'으로 생각하고 여산폭포가 삼천척이니 이 폭포는 삼백척쯤 되겠지라는 심상을 노래한 것이지요. 다음 구절도 역시 망여산 폭포의 구절, '하늘에서 은하수 쏟아져 내리는 듯 하다.'에서 컨닝한 것으로 의심되는 구절입니다. 뭐 이쯤 하지요. 제가 숙종이라는 인물을 참 마뜩치 않아하는터라... 점수가 짜네요.


농사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 창경궁내 농사를 지었다는 청의정. 햇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서 뭐하는 짓거리인지.... 


이름은 좋은 태극정입니다. 

반대쪽에서 한장 더 찍어봅니다. 


돈화문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쭈욱 내려와 돈화문으로 나가면 관람이 끝납니다. 중간 중간에 오래된 나무들이 있었는데 (천연기념물만 넷이지요) 사진은 찍지 못했네요. 그 외에도 잘 관리된 정원의 모습이 언제나 걸을 마음이 나게하는 곳입니다. 봄과 가을은 꼭꼭 방문해 보시길 권합니다.


한참 걸었더니 배가 고파져서 이날 저녁은 도다리쑥국으로... 대단한 맛집은 아니었지만 제철에 이 메뉴가 맛없기도 힘들지요. 즐거운 하루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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