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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과 같은 팝 아티스트 말고도 더 브로드에는 다양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프 쿤스와 무라카미 타카시의 작품이 있는 중앙공간을 지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올라온 엘레베이터를 기준으로 왼쪽부터 작품관람을 시작하는데요, 처음 만나는 작가는 데미안 허스트입니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뼈'라는 작품입니다. 뭐 제목을 직역하면 지구 거대하고 작은 모든 생물들의 피하조직 아래 있는단단한 어떤 것. 정도되려나요? 영어 제목은 Something Solid Beneath the Surface of All Creatures Great and Small입니다. 


이 작품은 특히 아이들과 남자들이 좋아하더구만요. 계속 앞을 얼쩡얼쩡 하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역사 박물관을 축소시켜 둔 듯 해서 매우 관심이 있었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데미안 허스트라는 걸 알고 헉 했지만요. 좀 많이 안좋아하는 작가거든요. 싫어하는 작가의 작품도 마음에 들 수는 있군요.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Chlorpropamide입니다. 클로르프로파마이드는 당뇨환자들의 혈당을 낮춰주는 약인데요 뭐 저런 식의 색색이 고운 약은 아닙니다. 주로 연녹색이나 연한 파란색의 약이 유통되고 있는 걸로 아는데 거기다 멋대로 작가가 상상력을 붙여서 그린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굳이 사람이 있는데 찍은 건, 이 위치가 항상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사람이 없어질 때 까지 기다리기 어려웠기 때문이고 데미안 허스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도 작용했습니다. 뭐 검색하면 얼마든지 제대로 된 사진을 보실 수 있으니까요.


카라 워커(Kara Walker)의 두 작품이 한 공간에 전시되어 있네요. 작품이 커서 전체를 찍기 어렵군요. 카라 워커는 2007년 타임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들어간 예술가입니다. 뭐 더 브로드 컬렉션의 작가치고 한 시대의 아이콘이 아닌 수준의 사람을 찾기 힘들겠지만요.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저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이렇게 프로필/상 받은 걸 좀 늘어놔 줘야 예술품에 '그럼 봐야지'하면서 관심이 가는 법이라서요. 


유리상자 안에 든 작품은 Burning African Village Play Set with Big House and Lynching. 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런 검은 이미지 어디서 많이 보지 않으셨나요? 원래 인형극 같은데서 동화 속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는데요 그러다보니 밝고, 건전한 - 어찌 보면 아이들이나 보는 동화의 -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밝고 건전한 이미지를 '역사속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대 미술에서 좋아하는 '기존 이미지의 반전'이지요. 제목부터가 아프리카의 마을을 불태우고, 린치를 가하는... 그런데 이미지는 지극히 평화로운 동화같은. 뭐 작가가 기대한 것은 그 반전효과인 듯 합니다만...


벽에 있는 큰 작품은 African't라는 작품인데. 글쎄요. 저는 이런 흑백 대비가 그렇게 선명하게 주제를 부각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이 화려한 브로드 미술관에서는 더욱 더 그런 느낌이에요. 약간 허름한 곳에서 전시하면 오히려 더 주제가 부각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찰스 레이(Charles Ray)의 Fall '91이라는 작품이에요. 뭐야? 그냥 여자 마네킹아냐?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이 마네킹 높이는 2.4미터입니다. 일상 생활에서는 남성이 신체 조건상 대부분 여성을 내려다보고 이야기하는 편인데 이 마네킹 앞에서면 여성이 남성을 내려다보는 위압감을 느낄 수 있어요. 남성에게도 여성의 시선을 경험하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지요.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 작가 이름의 발음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녹색 키스, 붉은 포옹 정도로 번역되는 작품입니다. 영어 제목은 "Green Kiss/Red Embrace (Disjunctive)". 이 작가는 사진을 몽타주해서 작품을 만들 때 얼굴을 곧잘 지워버리는 데요, 아마도 얼굴을 지워버림으로써 인물에 따라 (잘생김/못생김) 분산되는 시선을 막고 주제에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게 아닐까 정도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앞에 서 있는 두 남녀는 하필 저 작품앞에서 왜 저렇게 분위기를 잡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행위 예술가일까요? 


마이크 켈러(Mike Kelley). 건축학의 꽃(Flower of Architecture). 뭔가 록밴드 앨범표지같은 작품이네요.


글렌 리곤(Glenn Ligon)이라는 작가의 Double America 2. 아메리카와 대칭되는 아메리카. 그래서 더블 아메리카.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타입의 예술이네요. 전 예술가가 아주 기발하거나 아니면 무지하게 고생했을 법한 작품이 좋더라구요.


역시 동일한 Glenn의 작품. 혁명을 기억하며(Remember the Revolution #1). 눈에 띄는 색감의 대비가 있긴 하지만 아주 관심은 가지 않네요. (더 브로드 홈페이지에 별다른 해설이 없는 작품은 저도 참고할 내용이 없어 짧게 쓰고 있습니다.)


역시 글렌 리곤의 탈출(Runaways)라는 작품입니다. 뭔가 흑인 노예들이 탈출하는 장면을 그린 이야기의 첫 시작같은 느낌입니다.

에릭 피슬(Eric Fischl). 사이공에서 탈출(The Evacuation of Saigon). 월남전을 소재로 한 작품인 듯. 한장의 캔버스가 아닌 여러장의 캔버스를 사용한 게 독특했습니다. 


데이비드 보나로비치(David Wojnarowicz) 미국 역사 요약. (The Newspaper as National Voodoo: A Brief History of the U.S.A.) 많은 현대 미술가들이 그렇듯, 이 작가도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 대한 차별을 작품에서 표현합니다. 자신이 뉴욕에서 활동할 때 AIDS 환자로 오인받아 핍박받던 경험 때문이기도 하겠네요. 하지만 왜 미국의 역사가 고문 당하는 저런 미이라로 대표되는지, 뭘 나타내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사회의 일부라면 모르겠는데... 


익숙한 톤이다 싶었는데 역시나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작품이었네요. 제목이 없는 작품이지만 자본주의의 폐단을 비판하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그림의 기묘한 동물은 '자본주의의 돼지'인데요 녹색의 잡동사니, 쓰레기를 입에서 토하고 있습니다. 상품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사람들이 그 토사물에서 태어나서 돼지의 젓을 빨아 먹습니다. 녹색은 흔히 미국 지폐를 의미하는 색이라고 하며 결국 이 모습이 의미하는 건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라 하네요. 


역시 키스 해링의 붉은 방(Keith Haring, Red Room). 흠.. 잘 모르겠어요. 간결한 선과 원색이 이 작가의 대표이긴 한데.. 유명한 작품이긴 하지만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는군요. 위의 작품은 정말 맘에 들었는데.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의 작품. 위 그림은 제목은 없지만 작가의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파란색과 황토색 배경은 삶과 죽음을 각각 나타내고 작가는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표정은 매우 무기력하고 눈도 탁하네요. 작가의 극도로 불안함을 표현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역시 장 미쉘 바스키아의 작품. 눈과 계란(Eyes and Eggs). 뭔가 좀 날로 먹는 듯한 그림입니다.


역시 같은 작가의 작품이고 호른 연주자(Horn Players)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이 작가가 재즈를 무척 좋아하기도 하고 연주자로도 활동한다고 하네요. 


존 아헤른(John Ahearn) 레이몬드와 토비(Raymond and Toby) 음. 의외로 개이름이 레이몬드 일 수도 있다. 는 생각을 하며 본 작품입니다. 딱 사람만한 크기라 눈길을 끌기도 했구요. 


 

Sherrie Levine. Fountain (Buddha). 뭔가 황금칠한 변기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데요. 이건 아마도 미스셀 뒤샹의 동일한 이름의 작품 Fountain의 오마주가 아닐까 합니다. 1917년 뒤샹은 뉴욕의 한 전시회에서 변기를 'Fountain'이라는 이름으로 출품했었지요. 당시 전시회 주최측은 변기가 작품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해 전시를 거부했고, 당시 미술계에서 엄청난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뒤샹은 자신의 작품을 옹호하는 편지를 (실제로는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하지 않았고 Mutt라는 이름으로 변기를 출품했고, 따라서 뒤샹은 자신이 아닌 머트라는 가공의 예술가를 변호하는 내용이었음) 심사위원에게 보냈는데 "머트가 자신이 직접 그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평범한 생활용품을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견해아래서 제공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했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쨌든 논쟁 끝에 이 작품은 예술로 인정되었고 이후 여러 현대 미술 (제가 날로먹는 미술이라고 부르는) 장르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더 브로드에서 가장 맘에 든 작품입니다. 1층에 있는 다먹은 짜장면 접시를 만든 로버트 테리안(Robert Therrien)의 '테이블 아래에서' (Under The Table)라는 작품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별다른 게 없이 그냥 테이블로 보이죠? 


그런데 그게 사람이 그 아래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7.4m 높이 5.5m의 테이블입니다. 고양이 키우시는 분들은 탁자 밑으로 들어간 고양이가 느끼는 시선을 그대로 경험하실 수 있을 듯 하고 그게 무척 색다른 경험입니다. 위에서 보았던 2.4m 높이의 여성 마네킹과 비슷한 관점을 구현한 것이라 볼 수 있겠네요. 익숙한 사물/사람의 크기를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밑을 걷기만 해도 즐거워져서 계속 왔다갔다 했네요. 왼쪽에 서 있는 분은 자꾸 흠집을 내는 사람들이 있어서 지켜보는 분입니다. 다른 예술품과 달리 접촉해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예 많을만 하네요.


변기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기존에 있는 작품을 관점만 바꿔서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변기는 싫어하고 이 작품은 마음에 드는 이유는 경험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언더 더 테이블은 우리가 테이블 밑에 서서 직접 새로운 시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기를 분수라고 부르는 든, 샘이라고 부르든 그건 작가의 주장일뿐이고 저는 남이 다른 시각을 가지는 거야 알바 아니지만 그 시각을 경험하지도 못했는데 강요하지는 마라! 라는 입장인 거지요. 그래서 테이블은 좋고 변기는 싫어요.


오호라. 이것참 강렬한 사진이네요.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작품이고 제목은 없는데, 사진에 보이는 글씨 때문에 흔히 'Your Body is a battleground'라고 불리는 작품입니다. 왜 이런 제목이 붙었냐고 하면 이 작품이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의 자유'를 명시한 것에 관한 작품이거든요. 1973년 대법원 판단 이후에도 미국에서는, 낙태의 자유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1989년 워싱턴에서는 약 50만명의 여성들이 낙태의 완전한 자유를 외치며 행진을 벌였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그 행진에서 영감을 얻어, 혹은 그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인거죠.


낙태에 관해 저렇게 강렬한 이미지를 응축시키다니. 강렬한 인상만큼 메시지도 강렬하네요. 멋진 작품입니다. 이 작가 역시 1층에서 본 신디 셔먼과 함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작가로 꼽히죠. 그럴만하네요. 


역시 바바라 크루거 작품. Roy Toy라는 작품입니다. 표범에 고양이 얼굴을 붙인 듯한 사진인데 위의 사진과 유사한 톤이지만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네요. (아무런 설명서가 없어서ㅠㅠ)


역시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이것도 정말 단순하지만 맘에 들었습니다. 날 가져요.... 뭔가 애완동물과 집사간 교감인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단순한 다섯마디 말들의 모음이 마음을 끄는 게 정말 신기하더군요. 


로버트 롱고(Robert Longo)의 작품. 제목은 없지만 하얀 폭동(White Riot)이라는 부제는 있습니다. 목탄과 숯같은 재료를 써서 그린 그림이라 유화와는 다른 느낌,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모두 표정이 명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잭 골든스타인(Jack Goldstein). 불타는 도시. 아마도 어디 폐 공장 같은 데 가서 장 노출로 찍은 사진인가? 라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마크 탄세(Mark Tansey)의 아킬레스와 거북이(Achilles and the Tortoise). 제목을 보고 딱 떠오르는 건 제논의 역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아킬레우스가 아무리 빨라도 거북이를 따라잡으면 거북이는 느리더라도 조금 앞에 가 있을테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역설입니다. 그리스 시대에는 이 논리를 수학적으로 틀렸다고 증명하기가 불가능했다고 하는데 이 그림은 뭘 나타내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작가는 철학을 꼬아서 표현하는 데 능하다고 하는데, 미사일을 쏘아올려도 미사일이 (더 빠른 존재가) 나무가 자라는 속도(무지 느림)를 따라잡기는 불가능하고, 결국 사람은 죽게된다... 라는 걸 표현한 건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보고 싶었던 작품 (언더 더 테이블)을 봐서 기분이 좋네요. 이제 싫어하는 팝 아티스트들을 만나러 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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