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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체크인하고 짐정리하고 잠깐 한숨을 돌린다음, 피곤한 몸을 억지로 추스려 긴자로 나갑니다. 저녁을 긴자에서 예약해 두기도 했고, 여행을 왔는데 쓰러져서 잘 수는 없는 일이죠. 휴양을 온게 아니라 여행을 왔으니까요.
긴자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간 곳은 키르훼봉 긴자점! Quil Fait Bon.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기분좋고 날씨도 좋다' 정도의 의미라고 합니다. 일본어로는 なんていい陽気なんだろう라는 의미라는데 정확히 해석을 못하겠네요. 혹시 일본어 잘 하시는 분은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예예! 물론 케이크는 기분 좋은것입죠. 키르훼봉은 지금이야 최신 스위츠 트렌드에서 좀 밀린 듯한 느낌이지만 3년, 아니 5년전만 해도 제가 일본 가는 친구에게 제발 좀 사와달라고 굽신거리며 부탁을 하던 타르트 전문점입니다. 오랫동안 팬이었던 가게였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 꼭 들려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과거의 자신을 위한 선물이랄까요?
대부분의 일본 케이크 전문점이 '파티셰'가 메인으로 나서는 오너샵 형태이지만, 키르훼봉은 기업이 운영하는 타르트 가게입니다. 파티셰가 직접 가게를 차리는 게 유행인 시기 이전에 설립되었기 때문입니다. 키르훼봉을 운영하는 Rush Inc.는 본래 시즈오카시에서 잡화점을 경영하던 작은 회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1992년 시즈오카시에 처음으로 양과자점 '그랑메종'을 오픈한게 키르훼봉의 시초라고 해요. 현재 키르훼봉은 여러 곳에 지점이 있지만, 키르훼봉의 대표 샵임을 나타내는 그랑 메종의 이름은 이 긴자점이 가지고 있습니다.
키르훼봉 긴자점은 테이크 아웃으로 제품을 파는 1층과, 먹고 갈 수 있는 지하 1층의 카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진 왼쪽에 있는 화살표와 1/3 정도 나온 입간판에 써있는 말이 드시고 가실 분은 지하 카페로 가시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긴자역에 내리는 순간 저는 주위에 일절 눈을 돌리지 않고 굉장한 기세로 구글지도를 보며 키르훼봉을 찾아서 돌진해서 들어갔기 때문에 저 간판의 존재를 눈치챌 수 없었답니다. 결국, 테이크 아웃으로 사가지고 나오면서 뒤늦게 카페의 존재를 알게 되어, 카페로 가서, 테이크아웃한 타르트를 여기서 먹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차를 시켜서 함께 먹었답니다. 먹고 가실 분들은 공연히 시간 낭비할 필요없이 바로 카페로 가는 게 좋을 듯 하네요.
다른 각도에서 한 장 더! 크리스마스 한정판 타르트를 알리는 입간판과 유리에 붙여진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계절감을 알려줍니다.
매장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이런게 눈에 띕니다. 그래요! 시즌이 시즌이니만큼 크리스마스 한정판이 안나올리가 없지요. 한정판도 샵마다 조금 다르게 해서 파는데요 역시 크리스마스 = 붉은색 = 딸기 위주의 타르트가 많아 보이네요.
테이크 아웃 전문점이므로 쇼윈도에는 타르트가 가득 차 있습니다. 키르훼봉의 대표인 '계절과일 타르트'입니다. 계절마다 과일이 조금씩 바뀌는 데요 이건 '겨울 버전'입니다. 사과, 오렌지, 딸기, 바나나, 망고, 포도, 블루베리, 키위 색색의 조화가 아름답지 않나요?
색감이 잘 못 나온 듯 해서 한장 더 찍었습니다. 이제 좀 과일 색감이 분명하군요. 일본에서는 이제 키르훼봉조차 시대에 밀려가는 느낌인데 한국에서는 아직 여기에 비교할 과일 타르트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아쉬운 현실입니다.
12월-2월 한정, 몽블랑 타르트.
진한 초콜렛 크림 타르트! 에쿠아도르 아리바에서 수확한 크리올로 종의 카카오빈에서 추출한 초콜렛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표면이 약간 균일하지 않긴한데 이정도면 나쁘지 않죠.
티라미수 타르트
클래식 쇼콜라 타르트. 카카오 비율 55%의 초콜렛을 사용하여 구웠다고 되어 있는데 본 순간 너무도 궁금하더군요. 다른 타르트는 다 모양이 잡혀있는데 왜 저것만 저렇게 부스러진 모양인지 말입니다. 키르훼봉 정도 되는 가게에서 기술이 없어서 저렇게 만드는 건 아닐테구요. 맛이 궁금하긴 했지만 제 취향이 아닐듯하여 (55%라니 더 진해야 한다구요!) 손대지는 않았습니다.
베리타르트. 일본 이름은 붉은 과일 타르트입니다. 뭐 블루베리도 붉은 계열로 본다면 그럴 수 있겠네요.
홀사이즈로 구매하는 것도 가능하고, 피스로도 살 수 있습니다. 먼저 원하는 케이크를 줄 서 있는 동안 골라두고 주문을 하면 번호표를 주고요, 번호표를 받으면 줄에서 빠져나와 벽에 붙어 서있으면 됩니다. 타르트가 준비되면 번호를 부르는 데 일본어로 부르기 때문에 신경쓰고 있어야 합니다.
줄이 없어보인다구요? 그럴리가? 제가 간 날이 토, 일 2차례여서 그렇긴 하겠지만 20-30명은 항시 줄을 서 있었답니다.
시간이 갈 수록 혼잡해지는 매장. 문 앞에 서있는 경비원 차림의 분은 커플로 온 손님이면 카페가 있는 걸 알려주고 그 쪽으로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번호를 부르면, 계산대 앞으로 가서 계산을 하면 됩니다. 계산을 하기 전에 손님이 고른 타르트가 맞는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섬세하게 포장해 줍니다. 솔직히 타르트는 못만들더라도 이런 기본적인 포장이나 해줬으면 좋겠지만 아직 한국은 대부분 가게가 이런 포장에 신경을 덜 쓰기 때문에 아쉽습니다. 물론 점점 신경쓰는 가게들이 많아지고 있지만요.
키르훼봉의 타르트 포장입니다. 옆서같은 형태지요? 선물로 줄 때 여기에 간단히 써서 보내면 받는 사람도 즐거워할 듯 하네요.
Le Gall 버터, 치즈를 쓰고 있다는 선전입니다. 에쉬레나 보르디에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 생산되는 버터입니다. 상당히 고급 버터겠지만, 2009년 에쉬레 마루노우치점이 오픈하면서 버터를 때려붓듯이 사용해서 만들어진 비엔누아즈리(Viennoiserie)를 선보인 이래 저 역시 상당히 진한 맛에 익숙해져버렸습니다. 그런데 키르훼봉의 타르트는 예전의 적정량(?)을 쓰는 레시피를 유지하고 있는 듯 합니다. 먹어보면 버터향이 훅 하고 올라오지 않습니다. 사실 과일타르타가 추구해야 하는 맛이 그게 아니기도 하구요. 신선한 과일맛과 향을 살리기 위해서는 버터맛은 좀 얌전해 져야 한다는 방침이랄까요?
타르트를 구매하고 나오다가, 비로소 카페의 존재를 알게되어 카페로 이동합니다. 중간에 MINX라는 가게가 있고, 바로 옆에 좀 들어가서 문이 있습니다. 주말 저녁에 15분 정도 기다리는 거니 많이 기다리는 건 아니군요. 일본에서는 말이죠. 이후 돈까스 나리쿠라 등을 가보고 15분 기다리는 건 그냥 준비운동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래되보이는 듯한 계단을 내려가면 (긴자에는 오래된 건물이 많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면, 기다릴 수 있는 좁은 공간이 있습니다.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기다려봅니다.
크리스마스라 벽에는 이런 장식이 붙어 있네요. 이마저도 없으면 좀 쓸쓸하고 황량한 공간입니다. 15분 정도 기다렸더니 번호를 불러주더라구요.
입구는 좁지만 내부는 꽤나 넓습니다. 그리고 남자손님은 매우 희긔한 존재로 여자 손님에게 끌려온 듯한 인상입니다.
타르트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손님과 스마트폰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손님이 대비되는군요.
우리가 구매한 타르트를 가져가더니 접시에 곱게 세팅해 줍니다. 무조건 한 접시에 하나의 타르트 서빙이 원칙인 듯 합니다. 이런 점도 마음에 드네요. 고급 케이크 샵이 비슷한 원칙인 듯 한데 히데미 스기노의 경우는 케이크를 하나만 올려두는 접시, 두개를 올려두는 접시가 따로 있었습니다.
자! 그럼 맛을 볼까요? 긴자한정이라고 되어 있어 골라본 '사과꿀우유 타르트'입니다. 이 타르트는 홀 사이즈였을 때 사과장식 모양이 예뻤는데요 사과조각을 장미꽃 모양으로 장식했더라구요.
우유로 된 크림무스가 중간에 있고, 위에는 꿀로 절인 사과가 있습니다. 꿀로 절인 사과라... 집에서 사과를 절일 때 꿀을 써본일이 종종 있는데요 (전문가도 아닌데 이런 짓을 한 이유는 한국에서 만족스럽게 절인 사과 케이크를 단 한번도 발견한 적이 없어서입니다.) 만족스러운 당도로 절이려면 원가가 너무 들어갑니다. 그냥 꿀을 퍼붓고 퍼부어야 만족스러운 당도가 나오는데 키르훼봉은 그 점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싶었는데 역시 당도를 높이기보다는 부드러운 촉감을 살리고 과하게 절이지 않았네요. 아쉽습니다. 섬세함을 추구한 케이크입니다만 좀 더 강했으면 좋겠는데요.
두번 째, 가을겨울 한정, 몽블랑 타르트. 우유 무스, 밤 페이스트의 구성입니다. "음.... 아아! 역시 맛있어. 몇년간 기대하고 그리던 맛이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네요. 밤크림의 농도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뭐죠? 뭐죠? 한국 타르트보다야 맛있지만 이건 너무 섬세함만 강조된 것 아닌가요? 저는 결정적인 한 방을 때려주는 그런 걸 기대하고 있는데요.
사과 프랑 타르트. 이름을 잘 못 읽어서 사과 타르트를 두 개나 시켜버렸네요. 처음의 사과타르트보다는 좋았지만 역시 기대했던 맛은 아닙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배가 불러서는 아니고 너무 피곤해서 일까요? 셋다 하나같이 뭔가 빠진 듯한 맛이었습니다. 왜죠? 오히려 먹으면서 당황해야 했네요.
홍차를 시켰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느낀 점은 일본 사람들은 '홍차의 떫은 맛을 참으로 싫어하는구나!' 아마도 떫은 맛을 뺀 홍차를 세련된 맛으로 생각하는 듯 합니다. 편의점에서 파는 홍차는 물론이고 케이크 샵에서 먹는 모든 홍차가 기본으로 떫은 맛을 빼서 가져옵니다. 케이크와 함께 먹으려면 어느 정도 탄닌의 떫은 맛이 있는 걸 선호하는 데 아쉬웠네요. 물론 무조건 떫은 차를 선호하는 건 아닙니다. 기본적인 맛이 있어야죠.
이건 다음 날 다시가서 사온 키르훼봉을 대표하는 과일 타르트입니다. 호텔에 가져와서 아침 식사 대용으로 먹었네요.
어제 좀 실망했으면서도 다시 키르훼봉을 방문해서 이걸 가져온 이유는 이 대표 타르트가 어제 다 떨어져서 맛을 못봤기도 했지만, "내 몸상태가 피곤해서 그런건가?" 였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아니었네요. 맛이 없는 건 아닙니다. 좋은 타르트 맞아요. 과일맛도 좋고 카스타드 크림도 나쁘지 않습니다. 오래된 레시피 그대로여서 유행에는 좀 쳐질지 몰라도 타르트의 파이의 맛, 질감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기대하던 그 맛이 아니에요. 섬세함도 중간정도, 맛도 중간정도. 어딘가 더 잘할 수 있는데 잘하기를 그만 둔 "이정도만 해도 충분하지?"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 있는 타르트와 비교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과일 타르트를 먹어본 적도 없으니까요)
붉은 과일 타르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먹고 나서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으로 잠시 멍하니 있었네요. 오랫동안 가고싶었던 키르훼봉의 경험은 이것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내 취향의 좋은 가게가 많은데 굳이 맞지 않는 가게와 씨름할 필요는 없는 노릇이죠.
맛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당황스러웠네요. 단언컨데 키르훼봉의 타르트는 제가 먹어본 과일 타르트 중에서는 최고 였습니다. 그런데 과일 콤포트, 혹은 생과일, 밤크림, 우유크림, 타르트 파이 같이 각각의 요소를 놓고 보면 키르훼봉 보다 좋은 조합이 떠올라 불만족스러운 거에요. 억지스럽지만 전 과일타르트에서 지나친 기대를 아마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지나치게 버터리-버터리한 맛에 중독되어 섬세한 맛에는 만족하지 못하게 된 걸까요?
모든 의문들은 히데미 스기노를 만나면서 다 정리되어 버렸습니다. 내가 그리던 이상적인 맛을 능가하는 맛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 이야기는 한 참 후에 써보겠습니다. 이건 아직 도쿄에 온 첫날 이야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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